바다에서 온 사람들
아일랜드의 오래된 이야기에는 바다를 건너오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배에 가족과 무기를 싣고, 저마다의 기술과 이름을 지닌 채 섬에 닿는다. 어떤 이들은 평야를 열고 터전을 세우며, 어떤 이들은 전염병과 전쟁으로 사라진다. 뒤이어 온 사람들은 앞선 이들의 땅을 차지하고, 다시 다음에 올 사람들을 기다린다. 우리가 아일랜드 신화의 첫머리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이렇게 여러 번 주인이 바뀌는 섬이다.
이 이야기들은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쓴 역사가 아니다. 오랫동안 전해지던 신과 영웅의 이야기를 중세의 기록자들이 옮겨 적고 엮은 것이다. 그래서 같은 인물의 부모가 달라지기도 하고, 어느 이야기에서 죽은 이가 다른 이야기에서는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여기서는 그 여러 갈래 가운데 투어허 데 다넌과 포모르, 그리고 두 혈통 사이에서 태어난 브레스의 이야기를 따라가려 한다.
그들보다 먼저 섬을 찾아온 이들에게도 긴 역사가 있었다. 파르홀론의 사람들은 땅을 개척했으나 역병으로 몰락했고, 네메드의 사람들은 포모르의 압박 아래 놓였다. 네메드의 후손들이 흩어진 뒤에는 피르 볼그라 불리는 무리가 아일랜드로 돌아와 자리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그 많은 이름을 모두 기억할 필요는 없다. 다만 새 무리가 바다를 건너올 무렵, 섬에는 이미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고, 포모르라는 오래된 세력도 그 주변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된다.
그 새 무리의 이름이 투어허 데 다넌이었다.
투어허 데 다넌은 아일랜드 신화에서 신들의 무리를 이루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먼 북쪽의 섬들에서 마법과 지식, 여러 기예를 익혔다고 한다. 그들의 힘은 전사의 팔에만 있지 않았다. 대장장이가 쇠를 다루는 기술, 의사가 상처를 아물게 하는 지식, 시인이 말을 엮고 악사가 선율을 다루는 솜씨도 모두 그 힘의 일부였다. 그 세계에서는 뛰어난 기술과 마법 사이의 거리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웠다.
그들이 가져왔다는 네 보물에도 이러한 세계가 담겨 있다. 참된 왕을 맞으면 울린다는 돌 리아 팔, 맞설 수 없는 루의 창, 칼집에서 나오면 피하기 어렵다는 누아다의 검, 찾아온 이들을 굶주린 채 돌려보내지 않는 다그다의 솥이다. 왕을 알아보는 힘과 싸움에서 이기는 힘, 사람을 먹여 살리는 힘이 나란히 보물의 자리를 차지했다.
투어허 데 다넌이 아일랜드에 도착했을 때, 주변은 연기와 안개에 잠겼다고 한다. 그들이 구름을 타고 왔다고 전하는 이야기도 있다. 여기서 따라갈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그들은 배를 타고 도착한 뒤, 되돌아갈 생각을 버리려고 자신들의 배를 불살랐다. 불타는 배에서 피어난 연기가 땅과 하늘을 뒤덮었다. 새로 온 이들은 섬에 남기로 했고, 이미 그곳을 다스리던 피르 볼그는 그들을 맞아 싸우기로 했다.
은으로 만든 손과 비어 있는 왕좌
투어허 데 다넌을 이끈 왕은 누아다였다. 그의 백성과 피르 볼그는 마그 투레드에서 싸웠다. 훗날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또 다른 큰 전쟁이 벌어지므로, 이 싸움은 첫 번째 마그 투레드 전투라 불린다.
전쟁은 투어허 데 다넌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누아다는 피르 볼그의 전사 스렝에게 한쪽 팔을 잃었다. 백성을 이끌고 땅을 얻은 왕이, 바로 그 승리의 대가로 왕좌에 앉을 자격을 잃게 된 것이다.
이 이야기 속 왕은 몸에 결손이 없어야 했다. 왕의 몸이 온전해야 한다는 관념이 왕위의 자격과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부당한 조건이지만, 누아다와 그의 백성이 살아가는 이야기에서는 왕의 거취를 결정하는 무거운 규칙이었다.
의술에 능한 디안 케흐트와 장인 크레드네는 누아다를 위해 은으로 된 손을 마련했다. 그 손은 살아 있는 손처럼 움직였고, 누아다는 ‘은손의 누아다’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은으로 빈자리를 메운 것만으로는 왕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뒤에 디안 케흐트의 아들 미아흐가 살과 힘줄을 잇고 누아다의 몸을 회복시키기 전까지, 투어허 데 다넌에게는 다른 왕이 필요했다.
사람들이 선택한 이는 브레스였다.
브레스는 투어허 데 다넌 사이에서 자랐지만, 그의 아버지는 포모르의 왕이었다. 두 세력을 잇는 혈통은 그를 왕으로 선택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에게 왕좌를 맡기면 포모르와의 동맹도 단단해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의 즉위에는 조건도 따랐다. 통치가 그릇되면 왕위를 돌려주어야 했다. 왕관은 아름다운 머리 위에 올려놓는 장식이면서, 그 머리가 짊어져야 하는 약속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째서 투어허 데 다넌은 포모르 왕의 아들을 자신들의 왕으로 세울 수 있었을까. 그 까닭을 알려면, 먼저 브레스가 태어나기 전의 바닷가로 돌아가야 한다.
에리우와 은빛 배의 왕
포모르는 아일랜드의 오래된 이야기에서 전쟁과 공물, 위협의 모습으로 자주 등장한다. 기이한 몸을 가진 존재들도 있으며, 무서운 눈을 가진 발로르처럼 강력한 왕도 있다. 하지만 포모르라는 이름만으로 모든 구성원의 모습과 성품을 짐작할 수는 없다. 그들에게는 여러 왕이 있었고, 투어허 데 다넌과 싸우는 한편 동맹을 맺고 자녀를 두기도 했다.
엘라하는 그 여러 왕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그가 처음 이야기 속으로 들어오는 모습은 괴물이 해안으로 밀려오는 광경과는 사뭇 다르다.
어느 날, 투어허 데 다넌의 여신 에리우가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결은 잔잔했고, 바다는 넓고 평평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 위로 은빛 배 한 척이 다가왔다. 배에는 더없이 아름다운 남자가 타고 있었다. 그의 금빛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내려왔으며, 옷에는 금실 장식이 빛났다. 보석을 박은 브로치와 정교한 무기에서도 그가 평범한 나그네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에리우와 그 남자는 만나 인연을 맺었다. 짧은 만남 뒤 남자가 떠나려 하자 에리우는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그와 헤어지는 일이 슬펐고, 자신이 마음을 준 상대가 누구인지조차 아직 알지 못했다.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그는 포모르의 왕 엘라하였으며, 두 사람의 만남으로 아들이 태어나리라고 말했다. 그리고 손가락에서 금반지를 빼 에리우에게 주었다. 그것을 팔거나 다른 이에게 주지 말고, 반지가 꼭 맞는 이에게만 건네라는 당부도 남겼다.
그는 아이의 이름까지 일러주었다. 에오하드 브레스. 이야기 속에서 브레스라는 이름은 아름다움과 연결된다. 훗날 아일랜드에서 아름다운 것을 보고 그 아이의 이름을 떠올리게 되리라는 예고였다.
엘라하는 자신이 왔던 길로 돌아갔다. 에리우에게는 금반지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남았다. 이 전승은 두 사람이 혼례를 올리고 한집에서 아이를 길렀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브레스는 어머니와 투어허 데 다넌의 세계에서 자랐고, 아버지를 찾아가는 일은 훨씬 뒤에야 서사의 중심으로 들어온다.
아이의 성장은 보통 사람과 달랐다. 한 주가 지날 때마다 두 주만큼 자라는 듯했고, 일곱 해 만에 열네 해 자란 아이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이는 신화가 비범한 아이의 성장을 전하는 방식이다. 이름에 예고된 아름다움도 그와 함께 자랐다. 그렇게 두 세력의 피를 함께 지닌 브레스가 누아다 다음의 왕으로 선택되었다.
에리우는 이 이야기에서 아들을 낳고 그의 출신을 증명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아일랜드 신화 전체에서 그녀의 자리는 그보다 넓다. 에리우는 섬 자체의 이름과 연결되는 여신이며, 훗날 새로운 사람들이 아일랜드를 차지하러 올 때 다시 중요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한 왕의 어머니이면서, 왕들이 차지하려는 땅의 이름을 지닌 여신이기도 한 것이다.
아름다운 왕의 빈 식탁
브레스의 아름다움은 그를 좋은 왕으로 만들어주지 못했다.
그가 다스리기 시작하자 포모르의 왕들은 아일랜드에 무거운 공물을 부과했다. 집마다 바쳐야 할 몫이 생겼고, 투어허 데 다넌의 뛰어난 이들까지 고된 노동에 동원되었다. 힘센 전사 오그마는 땔나무를 날랐고, 다그다는 브레스의 성채를 짓는 일을 했다. 오그마는 제대로 먹지 못해 쇠약해졌으며, 힘겹게 가져오던 나무의 상당 부분을 바다에 잃었다고 전해진다.
공물을 거둔 포모르 왕들의 이름에는 엘라하도 들어 있다. 이 사실은 뒤에 그가 브레스에게 건네는 말을 이해할 때 기억해둘 만하다. 아들의 통치를 비판하는 아버지 역시, 아일랜드에서 이익을 얻던 포모르의 질서 바깥에 서 있지는 않았다.
브레스의 집에서는 왕에게 기대되는 환대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찾아온 이들에게 충분한 고기와 술이 돌아가지 않았고, 시인과 악사들의 기예로 흥겨워야 할 자리도 비어 있었다. 왕은 사람들에게서 부를 거두었지만, 그 부를 사람들이 함께 누릴 수 있도록 돌려주지 않았다.
여기서 환대는 손님에게 조금 더 친절하면 좋겠다는 정도의 예절이 아니다. 이 이야기에서 왕의 식탁은 통치의 모습을 드러낸다. 전사는 왕을 위해 싸우고, 장인은 기술을 보태며, 시인은 왕과 공동체의 이름을 기억한다. 왕은 그들에게 음식과 선물, 보호와 명예로 응답해야 한다. 왕의 집을 찾아온 사람들이 굶주리고 홀대받는다면, 그가 누리는 부와 권세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의심받게 된다.
브레스에게 결정적인 말을 던진 사람도 전장에서 칼을 든 적장이 아니었다. 카이르프레라는 시인이었다.
왕의 집을 찾아온 시인에게는 어둡고 비좁은 거처가 주어졌다. 불도, 제대로 된 잠자리도 없었다. 음식이라고 받은 것은 작은 접시에 놓인 마른 빵 세 조각이었다. 이튿날 시인은 감사의 노래를 남기지 않았다. 그는 브레스의 인색함과 환대 없는 집을 겨냥한 풍자시를 지었다.
이야기는 그 노래 이후 브레스의 번영이 시들었다고 전한다. 시인의 말은 단순한 불평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세계에서는 명예를 무너뜨리는 말이 실제로 사람의 힘과 운명을 손상시키기도 했다. 왕에게는 병사뿐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중요했다.
마침내 투어허 데 다넌은 브레스에게 왕위를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즉위할 때 마련했던 약속이 그에게 돌아온 것이다. 그동안 누아다는 미아흐의 치료로 몸을 회복했고, 다시 왕으로 설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브레스는 왕위를 내놓아야 했다. 그러나 요구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왕이었던 자신까지 쉽게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유예를 청했다. 그 시간이 지나면 무엇을 할 것인지, 이야기 속 브레스의 마음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자신을 몰아낸 이들을 누를 힘을 모아, 왕국을 되찾고 싶었다.
반지가 맞는 손
왕좌를 잃은 브레스는 어머니에게 자신의 아버지 쪽 혈족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에리우는 오래전 은빛 배를 보았던 바닷가로 그를 데려갔다. 그리고 간직해두었던 금반지를 꺼내주었다.
반지는 브레스의 손가락에 꼭 맞았다.
에리우와 브레스는 포모르의 땅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모인 큰 집회들이 있었다. 낯선 방문객을 맞은 이들은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묻고, 개와 말의 빠르기를 겨루자고 청했다. 방문객들이 데려온 개와 말은 뛰어났다. 이어 무기를 다루는 솜씨를 보일 사람을 찾자 브레스가 나섰다.
그가 검을 든 손을 올렸을 때, 엘라하는 손가락의 반지를 알아보았다. 에리우는 그 청년이 그의 아들이라고 밝혔다. 오래전 바닷가에서 헤어진 두 사람 사이의 아이가, 이제 왕국을 잃은 왕이 되어 아버지 앞에 서 있었다.
엘라하는 아들에게 어째서 자신이 다스리던 땅을 떠났느냐고 물었다. 브레스는 자기 잘못을 말했다. 자신의 부당함과 오만 때문에 그렇게 되었으며, 사람들의 재물과 먹을 것을 빼앗았다고 인정했다.
브레스에게는 적어도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알아볼 능력이 있었다. 다만 그 인정은 왕위를 되찾고 싶다는 욕망과 함께 존재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말한 뒤에도 군사를 구했다. 옳지 못하게 다스려 잃은 땅을, 이번에는 힘으로 되찾으려 했다.
엘라하는 그런 아들을 곧바로 두둔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저주를 받는 왕이 되기보다 그들이 잘살도록 하는 편이 낫다는 취지로 꾸짖었다. 정당하게 얻지 못하는 왕권을 부당한 방법으로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아버지의 인정과 지원을 구하러 온 브레스에게, 아버지는 먼저 왕의 책임을 돌려주었다.
하지만 대화는 그 훈계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브레스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자, 엘라하는 그를 다른 포모르의 유력자들에게 보냈다. 발로르와 인데흐였다. 그들은 아일랜드를 향해 보낼 거대한 군대를 모았다. 바다 위에 이어진 배들이 섬과 섬 사이의 다리 같았다고 할 만큼 큰 원정이었다.
엘라하의 말과 행동 사이에는 간단히 풀리지 않는 틈이 있다. 그는 브레스의 잘못을 알아보았고, 그것을 잘못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아들이 군사적 도움을 구할 길을 열어주었다. 그가 한 훈계도, 그 뒤에 마련해준 연결도 이야기의 일부다. 어느 한쪽만 남기면, 이 부자가 다시 만난 자리에 놓여 있던 복잡함을 놓치게 된다.
브레스에게 어머니는 자신의 출신을 알고 반지를 지켜온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뒤늦게 찾아가 자신의 패배를 설명해야 했던 왕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혈족은, 그를 길러 왕으로 삼았던 어머니의 백성을 향해 무기를 들었다.
타라의 문 앞에 선 청년
그사이 투어허 데 다넌은 누아다를 중심으로 다시 모였다. 왕들이 연회를 열고 기예를 지닌 사람들이 모이는 타라에 어느 날 낯선 청년이 찾아왔다. 그의 이름은 루였다.
문지기는 그에게 무슨 재주가 있느냐고 물었다. 타라에는 쓸 만한 기예가 없는 이를 들이지 않았다. 루는 자신이 장인이라고 답했다. 문지기는 이미 장인이 있다고 했다. 대장장이라고 해도, 전사라고 해도, 악사나 시인이나 의사라고 해도 답은 같았다. 그 일에 뛰어난 사람이 왕의 집에 이미 있었다.
그러자 루는 그 모든 재주를 한 몸에 갖춘 이도 있느냐고 물었다.
그 질문이 문을 열었다. 루는 여러 기예를 함께 갖춘 이로 인정받았고, 누아다는 그에게서 포모르의 압박을 벗어날 가능성을 보았다. 전쟁을 준비하는 중심에 루가 서게 되었다. 그는 전사만 부르지 않았다. 무기를 만들 장인, 상처를 치료할 의사, 주문을 외울 드루이드와 시인 등에게 각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었다. 드루이드는 이 이야기 속에서 마법과 의례, 특별한 지식을 다루는 사람이다. 칼을 쥔 이들 뒤로도 전쟁을 떠받치는 손과 목소리가 있었다.
루 역시 두 혈통을 함께 지닌 인물이었다. 아버지 키안은 투어허 데 다넌이었고, 어머니 에흐네는 포모르의 왕 발로르의 딸이었다. 브레스와 마찬가지로 두 세력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 이번에는 투어허 데 다넌의 편에서 싸움을 이끌었다.
이 대목에서 두 진영의 경계는 더욱 복잡해진다. 포모르의 피를 이었다는 사실만으로 브레스의 실패를 설명할 수는 없다. 같은 혈통의 경계를 넘나드는 루가 다른 편에 서 있기 때문이다. 전쟁이 벌어진 까닭은 서로의 피가 섞일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누가 공물을 거두고, 누가 노동하며, 누가 이 땅을 다스릴 것인가를 둘러싼 다툼이었다.
두 번째 마그 투레드
두 번째 마그 투레드 전투에서 투어허 데 다넌이 맞선 상대는 포모르였다. 첫 번째 전투가 아일랜드에 자리를 잡기 위한 싸움이었다면, 두 번째는 그 땅에서 계속 공물을 바치며 살 것인지를 결정하는 싸움이었다.
투어허 데 다넌의 장인들은 망가진 무기를 거듭 새로 만들었다. 대장장이 고브니우가 창날을 만들면 다른 장인들이 자루와 이음쇠를 마련했다. 치료의 샘에서는 상처 입은 전사들이 회복되었다. 싸움은 전장에 나온 이들의 용맹만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부러진 무기를 바꾸고 쓰러진 사람을 다시 일으키는 힘이 다음 날의 전황을 바꾸었다.
포모르도 그 비밀을 알아내려 했다. 그들이 보낸 이는 브레스와 다그다의 딸 브리그 사이에서 태어난 루아단이었다. 그 역시 양쪽에 친족을 둔 인물이었다. 그는 투어허 데 다넌의 기술을 살피고 돌아간 뒤, 다시 그곳으로 가 고브니우를 공격했다. 그러나 상처 입은 대장장이는 창을 되던졌고, 루아단은 아버지가 있는 포모르의 진영으로 돌아와 죽었다. 아들을 잃은 브리그의 울음은 죽은 이를 애도하는 곡의 기원으로 이야기된다.
브레스가 되찾으려던 왕국을 둘러싼 싸움은 그의 가족에게도 죽음을 가져왔다. 하지만 전승은 그 순간 브레스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이후 그 상실을 어떻게 품었는지 길게 들려주지 않는다. 남겨진 것은 아버지 앞에서 죽은 아들과, 그를 위해 우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큰 전투가 벌어지자 누아다도 끝내 쓰러졌다. 그를 죽인 이는 발로르였다. 발로르에게는 전장에서만 열리는 무서운 눈이 있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면 그 시선이 적군의 힘을 꺾었다. 포모르의 군세 앞에 선 이들에게 그 눈은 전쟁 자체의 공포와 같았다.
루는 그 발로르와 마주쳤다. 외손자가 외할아버지 앞에 선 셈이었다. 발로르의 눈꺼풀이 올라가는 순간, 루가 무릿매로 돌을 날렸다. 돌은 눈을 맞히고 머리 뒤쪽으로 밀어냈다. 적을 향해야 할 무서운 눈이 포모르의 군대를 향하게 되었다.
전세는 기울었다. 전쟁과 예언의 여신 모리안은 투어허 데 다넌을 독려했고, 포모르의 대군은 바다 쪽으로 밀려났다. 투어허 데 다넌은 승리했지만, 누아다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돌아오지 못했다. 아일랜드의 신들은 큰 힘과 놀라운 치유의 능력을 지녔어도, 싸움에서 상처 입고 죽을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브레스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승자의 손아귀에 놓인 그에게 왕의 지위는 더 이상 목숨을 보장해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죽이는 것보다 살려두는 편이 이롭다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브레스는 소들에게 풍부한 젖을 얻게 하겠다고 했고, 한 해에 거듭 수확하게 하겠다고도 했다. 루와 지혜로운 이들은 그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침내 목숨을 보전할 조건으로 남은 것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거두는 데 관한 지식이었다. 브레스는 그 지식을 내놓고 풀려났다.
사람들의 먹을 것을 빼앗아 왕위를 잃은 이가, 마지막에는 먹을 것을 기르는 지식으로 목숨을 구한 것이다. 그의 아름다움이나 혈통이 해결하지 못한 일을, 그가 알고 있던 기술이 해냈다. 이 결말은 그의 통치에 대한 비판을 지우지 않는다. 동시에 그를 아무 능력도 없는 실패자로만 남겨두지도 않는다.
전투 뒤의 짧은 이야기에는 엘라하와 브레스가 함께 있는 연회장도 나온다. 포모르 쪽으로 넘어간 다그다의 하프를 되찾기 위해 다그다와 일행이 그곳에 도착한다. 하프는 주인의 부름에 응답하고, 슬픔과 웃음과 잠을 불러오는 선율이 울린다. 거대한 전쟁이 지나간 뒤에도, 부자의 이름은 그렇게 한 공간 안에 다시 놓인다.
땅에 남은 이름
투어허 데 다넌의 승리가 아일랜드에서 벌어질 모든 싸움의 끝은 아니었다. 그 뒤에도 새로운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왔다. 신화에서 게일인의 선조로 이야기되는 밀의 아들들, 곧 밀레시안이었다.
그들이 섬을 차지하러 왔을 때, 에리우와 그녀의 자매 반바, 포들라가 나타났다고 전해진다. 여신들은 새로운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이 땅을 불러달라고 청했다. 세 이름은 모두 아일랜드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남았고, 그 가운데 에리우의 이름은 오늘날의 아일랜드어 국명 에이레와 이어진다.
브레스의 탄생 이야기에서 은빛 배를 기다리지도 않은 채 낯선 왕과 만났던 여신은, 이곳에서는 땅의 이름과 함께 기억된다. 그녀의 아들이 왕좌에 오르거나 그 자리에서 쫓겨나는 동안에도, 왕들이 다스리려던 섬은 그녀의 이름을 품고 있었다.
밀의 아들들이 지상의 지배권을 얻은 뒤, 투어허 데 다넌은 인간의 눈에 쉽게 보이지 않는 세계로 물러났다고 이야기된다. 언덕과 봉분, 물 너머의 낯선 땅은 그들의 거처로 이어졌다. 뒤이은 전승에서 신들의 이야기는 시드의 주민들, 곧 요정 언덕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와 겹쳐 간다. 여기서 요정이라는 말을 작고 날개 달린 존재로만 생각하면 그 세계를 놓치기 쉽다. 그곳의 주민들은 아름답고 두려운 힘을 지닌 이들이며, 인간과 사랑하고 거래하고 다투기도 한다.
신들의 시대와 인간의 시대 사이에는 그렇게 완전히 닫히지 않은 문이 남는다. 인간이 보는 언덕 아래에 다른 이들의 집이 있을 수 있고, 평범한 바다 저편에서 오래전의 왕이 배를 타고 올 수도 있다. 옛이야기는 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하나의 지도로 정리해주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사는 세계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전부인 것은 아니라고 거듭 이야기한다.
브레스와 엘라하의 과거도 그 오래된 세계에 속한다. 한 사람은 아름다움과 두 혈통에 대한 기대를 안고 왕이 되었으나, 자신을 왕으로 삼은 사람들을 제대로 대하지 못했다. 다른 한 사람은 바다에서 나타나 아이의 이름과 반지를 남겼고, 훗날 그 아이가 실패한 왕으로 돌아왔을 때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길을 열어주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함께 보낸 어린 시절보다, 뒤늦은 만남과 잃어버린 왕국, 나무라는 말과 이어진 도움이 놓여 있다.
그들을 처음 만나는 독자가 기억해야 할 것은 긴 계보 전체가 아닐 것이다. 에리우가 지켜온 반지가 아들의 손에 맞았다는 것. 왕은 받을 줄만 알아서는 왕으로 남을 수 없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아는 사람도, 그것을 고치는 일에는 실패할 수 있다는 것.
은빛 배에서 시작된 인연은 그렇게 한 아이의 탄생을 지나, 왕관과 전쟁과 살아남은 이들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출처
「The Second Battle of Moytura」 · Whitley Stokes 번역, 1891.
CELT에서 읽기
「Cath Maige Tuired: The Second Battle of Mag Tuired」 · Elizabeth A. Gray 편집·번역, 1982.
CELT에서 읽기
「Myths & Legends of the Celtic Race」 · T. W. Rolleston, 1911. 제3장 「The Irish Invasion Myths」.
Internet Sacred Text Archive에서 읽기
에리우와 아일랜드의 이름에 관한 참고 자료.
Ériu · Wikipedia